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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여행/전라도 사찰

지리산 화엄사

by Pinetree3293 2021. 5. 16.

2021. 5. 15.

연곡사를 뒤로하고 노고단을 오르는 산행깃점이 되기도 하는 화엄사로 향한다.

화엄사는 신라 때부터 남악(南岳)으로 숭상되던 지리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대찰(大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2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544)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해회당(海會堂)을 짓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법왕(599) 때는 승려 3,000여 명이 거주하면서 인도적 화엄사상을 폈다고 한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645)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 73()를 모시고 와서

사사자삼층석탑과 공양탑을 건립했으며, 원효대사가 해회당에서 화랑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 10(670)에는 의상대사가 2 4 7간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 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丈六殿)과 법등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덕왕(재위 742~764) 때에 와서는 8 81암자를 갖춘 사찰로서 번영하였다고 하며,

헌강왕(875) 때에는 도선국사가 동5층석탑과 서5층석탑을 조성하면서 화엄사의 중흥조가 되었다고 한다.

 

 

화엄사 일주문

부도전

 

절 입구의 새로 지은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길가 왼편 산기슭에 부도밭이 있다.

절의 역사를 과시하고자 절 입구에 부도밭을 만드는 조선시대 후기 사찰의 경향에 따른 부도밭의 위치라 할 수 있다.

부도밭은 길을 따라 아래위 두 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래 단의 대지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5기의 부도가 있으며 넓은 대지가 비어 있어

앞으로 조영해야 할 부도를 대비하고 있다.

5기의 부도는 모두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석종형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많은 창작과 변형을 가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상단의 대지에는 조선시대 후기에서 근래에 이르는 부도들과 함께 탑비가 있다.

이곳에 조영된 부도들도 석종형으로 조선시대 후기에서 근래에 이르는 석종형 부도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불이문.

예전에는 일주문으로 사용되었지만 일주문이 새로 세워진후 사찰에서는 불이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엄사의 산문으로 인조 10년(1632년)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지리산화엄사’라고 쓴 정면의 현판은 선조의 네 번째 부인의 아들인 왕자 의창군이 쓴 것이다.

현판 한쪽 편에 ‘皇明崇禎九年嵗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명문이 씌어 있어서 인조 14년(1636년)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이문 좌측에 새로 불사중인 전각.  화엄세계라는 현액이 걸려있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보이는 기념품 판매점.

화엄사성보관.

벽암국일도대선사비.

 

벽암선사는 충북 보은 출신으로 법명이 각성이며, 호는 벽암으로 속성은 김씨이다. 선조 8(1575)에 태어났으며, 10세 때 화산(華山)의 설묵()을 스승으로 출가하여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 26(1593)에 승병에 가담하였다.

 

자운(慈雲)스님을 따라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해전(海戰)에서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봉은사에 주석하였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으며, 부휴(浮休)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군을 거느리고 축성을 감독하여 3년 만에 완성함으로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인조 8(1630)에서 인조 14(1636)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화엄사의 대웅전을 비롯해 보제루, 적묵당, 천왕문, 일주문 등을 중건하였다. 화엄사 외에도 송광사와 쌍계사, 법주사 등을 중건하는데도 몸을 바쳤다. 병자호란 때 이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자 의승 3천으로 항마군을 조직해 호남 관군과 호응하여 북진하던 중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인 고한(孤閑) 스님과 함께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그 후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가던 중에 병으로 사퇴하고 화엄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현종 1(1660) 세수 86, 법납 7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법제자로는 백곡(白谷) 처능(處能)이 있으며, 이곳 화엄사를 비롯해 송광사, 해인사, 법주사 등에 비를 건립하였다.

일주문(현재는 불이문)과 천왕문 사이에 위치한 금강문은 금강역사와 문수보현동자를 봉안한 건물로

인조 10(1632)에 벽암 각성선사가 중건한 건물이다.

우측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좌측에 밀적금강(密迹金剛)을 소조상으로 봉안하였다.

 

지형의 경사를 이용해 전면에는 자연석의 축대를 쌓았고, 초석은 막돌을 이용하였다.

평면은 도리통 3, 양통 2간으로 천왕문과 금강문의 일반적인 평면 형식을 따랐다.

좌우의 협간에는 앞쪽에 금강역사를 뒤쪽에 각각 사자와 코끼리에 올라탄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초익공식으로 초익공은 단부를 직절한 간단한 형식의 것을 사용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가구는 무고주5량으로 대들보는 심하게 휜 부재를 사용해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내외는 모로단청을 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정면 어간에 ‘金剛門’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반야문'이란 현판이 보이며 '템플스테이 수련원'이란 안내판도 보인다.

 

청풍당.

 

1987년 6월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였다.

백옥같이 아름답고 고결하며 청정한 마음의 향풍(香風)을 갖고 불보살님과 사중(寺中)을 위하여 시봉하며

수행정진하는 보사(補寺)님들이 거주하는 당우이다.

천왕문과 사천왕

 

천왕문은 조선시대 후기 일반적인 천왕문의 구성을 따르면서도 평면에서 양통을 설정한 방법과

천장의 구성방법 등에 있어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전체적인 건축 형식은 조선시대 후기 방법을 따르면서도 시기적으로 17세기적인 수법과

18~19세기적인 수법이 혼용되고 있다. 따라서 인조 때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된 후에 중수를 거치면서

일부에 형태와 구조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국천왕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이고, 증장천왕는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이다.

인조 10(1632)에 만들어진 것으로 4.4m 높이의 목조각이다.

 

광목천왕는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이고,

다문천왕는 보탑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이다.

벽암선사가 인조10(1632)에 만든 목조각이다.

 

만월당.

법고루.

 

보제루를 중심으로 운고각의 맞은 편, 즉 보제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 5월 1일에 착공하여 11월 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하였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건물로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에 비해 넓은 주간으로 설정하였다.

사방은 개방되어 있으며, 내부에 범종 하나가 걸려있다.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화엄사의 중심 마당 앞쪽을 가로막고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법요식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강당 건물이다.

인조대 벽암선사 중건하였고, 순조 27(1827) 금봉우익선사(錦峰祐益禪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1974년에 전남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4 12월에 리산 도광선사에 의해 중수된 바 있다.

 

보제루는 그 전면과 후면의 대지 높이에 차이가 있다.

화엄사 중심 마당 앞쪽에 위치하면서 앞쪽 절반은 축대 아래, 뒤쪽 절반은 축대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면은 누각형, 후면은 일반적인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누각 형식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보제루를 우회하여 화엄사 중심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반면에 중심 마당에서 보면 보제루가 앞쪽을 가로 막고 있는 형상이 된다.

원융료

청풍당

당간지주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로 가면서 오른 편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헌강왕 원년(875년)에 도선국사가 화엄사의 형국이 커다란 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당간을 이곳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당간은 남아있지 않고 지주만 서있다.

 

당간지주는 그 앞뒤로 장대석을 이용한 돌을 놓았고, 쌍을 이루는 지주 사이에 방형의 돌 위에 원통형을 비교적

높게 만든 당간을 받치는 석재를 하나 두었다.

당간지주는 높이에 비해 굵은 편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강하게 좁아지도록 만들어 강직하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한쪽 지주에는 상중하 세 개의 원형 구멍을 뚫었고, 맞은 편 지주에는 같은 높이에 원형의 홈을 파서

당간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주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모접기 하였는데, 모접기는 중간쯤에서 끝이 나고 상부는 모접기를 생략하였다.

가장 위쪽은 둥글게 곡선으로 접어 완결성을 높였다. 조형으로 보아 신라 때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선시대에는 당간지주를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과 대웅전

동오층석탑 보물 제 132 호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계 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으로 구성되었고,

옥개석의 높이가 낮은 편이며, 층급받침도 4단으로 되고 처마 끝의 두께가 가늘고 반전도 형식화 되는 등

신라 성기(盛期)의 석탑 형식이 약화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기단은 물론 1층 탑신까지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된 점도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5층으로 구성된 탑은 비교적 크기가 큰 편에 속하여 아직 탑의 기능이 쇠퇴한 시점에 조영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이 석탑은 신라 말 9세기 또는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표면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고 기단도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에 사리 장엄구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탑 속에서 발견되었다.

서오층석탑 보물 제 133 호

 

대웅전 앞 한 단 낮게 조성된 마당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의 오층석탑과 쌍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서오층석탑은 동탑에 비해 약간 앞쪽으로 위치시키고 그 중심축을 약간 보제루 쪽으로 돌려놓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 뒤의 ㄱ자형으로 꺾여 조성된 축대가 대웅전 쪽은 길고 각황전 쪽은 짧아 비대칭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진입이 두 탑의 중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화엄사의 전체 배치 속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의도된 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이 석탑은 동석탑과 쌍을 이루고 있지만 기단과 탑신에 조각을 가득 채워 장엄을 하고 있어 단순한 형태의 동탑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탑은 12지신과 8무리의 신들, 사천왕이 함께 새겨진 드문예로 1995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유물 47점이 탑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적묵당

 

인조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수하고 ,정조 22년(1798)에 행원(幸元)스님이 중수했으며,

1978년 명선(明煽)스님이 보수 하였다.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을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며 대중공사·회의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시왕을 모신 명부전은 대웅전 남쪽 마당 동쪽을 가로 막으며 서향하고 있다.

인조 8(1630)에 벽암선사가 중건하였으나 1970년에 리산 도광선사가 중수하였다.

 

명부전으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건물로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인조 8(1630)에 중건된 모습을 그대로 지닌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후대에 보수를 통해

모습이 많이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기둥 등의 부재는 1970년에 중수되면서 깔끔하게 치목된 부재로 교체되면서 현대적인 건축기법이 가미됨으로서

상당 부분 옛 모습을 잃게 되었다.

 

영전

 

원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과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하는 용도로 지어졌다.

그러나 연기조사를 비롯해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조사, 도선국사 등 화엄사 역대 대사들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1976년에 영정을 모두 도난당하고 현재는 보물 제1040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엄석경을 보관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인조 10(1632)에 벽암선사가 화엄사를 중건하면서 지었던 건물로 헌종 2(1836)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양식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둥과 수장재 및 공포의 형태로 보아 이 건물은 지어진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보물 제 299 호

 

각황전과 더불어 화엄사의 중심 불전으로 높은 축대 위에 별도의 기단을 마련하여 동남향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불의 삼신불(三身佛)을 모시고 있는 불전이다.

임진왜란으로 화엄사가 소실된 후 각황전에 앞서 인조 14(1636)에 벽암선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재 화엄사에서 각황전 다음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며,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의 비로자나불

원통전

 

각황전 앞마당 북쪽에 대웅전, 영전과 나란히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본존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제 300 호

 

원통전 앞에 위치한 이 석조물은 모든 시대를 거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기단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사자가 긴 장방형의 석재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현재 화엄사에서는 ‘노주(露柱)’라 부르고 있는데 그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설과 공양대(供養臺)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으나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 보물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정 명칭은 ‘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이나 탑인지의 여부도 확실하지는 않다.

이 석조물은 전체가 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맨 아래 기단부는 가구식 구조의 기단에서 기둥을 생략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두 4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에 받침돌 한 단을 놓고 4마리의 사자를 네 모서리에 배치하였다. 사자는 모서리를 바라보고 앉아있는데,

입은 다물거나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사자 아래와 위에는 각각 복련과 앙련을 두었다.

나한전

 

각황전과 응진전 사이 모퉁이에 위치한 나한전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 10(1632)에 벽암선사가 중건하였으나 정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나한전은 정조 19(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내부에는 후면과 양 측면 벽에 모두 7폭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후면 벽 어간의 석가여래상 뒤편에는 영산회상도를 걸었다.

그 좌우로는 측면까지 모두 4폭에 나누어 그린 십육나한도를 봉안했는데,

2004년에 이충렬(李忠烈) 거사(居士)가 금어(金魚)로 참여해 그린 것이다.

다시 그 바깥으로는 양쪽에 1폭 씩 두 폭에 사천왕을 나누어 그린 사천왕도를 걸었다.

각황전 국보 제 67 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아미타불과 다보불의 삼존불(三尊佛)과 사보살(四菩薩)을 모신 각황전은

현재 화엄사에서 가장 큰 불전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건축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화엄사 서쪽에 위치한 孝臺 아래쪽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동편에 위치한 대웅전과는 직각을 이루며

위치하고 있다.

각황전 앞에는 석등과 함께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있어 창건 당시 이곳이 화엄사의 중심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각황전 터에는 원래 신라 문무왕 10(670)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장육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엄사가 8세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육전 역시 8세기 또는 그 이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육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 26(1593)에 소실된다.

이때 내부에 봉안하고 있던 석경(石經)도 모두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각황전은 숙종 25(1699)에서 숙종 28(1702)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사를 중건한

벽암선사의 제자 계파 성능이 중창한 것이다.

3년에 걸친 큰 공역에 끝에 중창된 후 숙종 29(1703)에 목조 금칠한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봉안하고

일주일에 거친 경찬대법회를 열었으며, ‘각황전(覺皇殿)’으로 사액되었다.

숙종 때의 중창 이후 영조 45(1749)과 헌종 13(1847)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의 불단

 

불단은 후불벽에 의지하여 3간 너비로 마련하였으며 불단은 전체를 두 단으로 만들었다.

아래 단은 맨 아래 꽃을 화려하게 도안한 받침을 두었고 그 위를 3층으로 나눈 다음 죽절형(竹節形)의 기둥을 세워

장방형 격자로 나눈 속에 단순한 형태의 안상을 새겼다.

 

상단은 아래위 두 단으로 만들었다. 아래 단은 죽절형 기둥을 세워 장방형 격자를 나눈 속에 안상을 새겼다.

상단은 아래에 당초무늬를 새긴 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안상을 새긴 격자무늬를 반복시켰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불단의 모습을 갖춘 목조불단이다.

 

불단 위에는 3간에 걸쳐 각 간에 1구 씩 삼신불을 모셨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이 아미타불, 우측이 다보불이다.

각 불상은 수미단형 위에 복련과 앙련으로 이루어진 좌대를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 12 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적멸보궁 가는길

적멸보궁 가는길에 돌아본 각황전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 35 호

화엄사 사역(寺域)의 서북쪽, 소나무로 둘러싸인 높은 대지를 효대(孝臺)라 부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삼층석탑과 그 앞의 석등이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의 효성을 표현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사사자삼층석탑의 사사자로 둘러싸인 속에는 합장을 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전해지고 있다.

또 석탑 앞의 석등은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있는 스님이 받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고 있는 연기조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대지 위에는 뒷산을 배경으로 화엄사를 내려다보면서 동향한 석탑이 있고 그 앞쪽에 석등이 있으며,

둘을 연결한 중 이 석탑은 그 조형이 매우 독창적이고 각 부의 비례가 적당하며 조각도 매우 뛰어나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화엄사에 현존하는 유구 중 가장 시기가 빠른 것으로 유물과 유적으로 본 화엄사 창건시기에 해당한다.

 

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 역시 다른 곳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조형을 지니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높직한 연화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스님의 상()이 있다.

오른 손은 땅에 꿇은 무릎 위에 살짝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세운 왼 무릎 위에 올려 찻잔을 받치고 있다.

 

스님 주변으로 3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석탑을 바라보게 되는 쪽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한 삼각형 평면의 기둥 배열이다.

기둥은 팔각형으로 중간에 음각한 수평 띠를 두어 단조로움을 피하도록 했으며, 맨 위에 다시 깊게 음각한 선을 두어

그것이 지붕돌을 받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기둥들과 스님상의 머리 위에 팔각형 평면의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앙련을 새긴 받침돌을 둔 다음 역시 팔각형 평면의 화사석을 올렸다.

화사석은 네 면에 화창을 두었고 나머지는 아무 조각 없이 비워 두었다.

화사석 위의 옥개석은 지붕면이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원통형의 받침돌을 둔 다음 보주를 올려 마감하였다.

심축선상에 배례석 두 개가 놓여 있다.

 

 

 

화엄사 계곡

남악사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五岳의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신성하게 여기던 산으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 산신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 남악사이다.

남악사는 신축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끼고 화엄사로 오르는 길에서 계곡을 건너 한적한 곳에 따로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산신제는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신라 때에는 천왕봉에서 고려 때에는 노고단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나라에서 파견된 제관(祭官)에 의해 갈뫼봉 아래인 광의면 온당리 당동에서 중사(中祀)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13년(1737년) 남원부사의 주도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제사는 강제로 폐지되었다가

1969년에 들어와 구례군민의 뜻으로 이곳에 현재의 남악사를 세우고 매년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산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화엄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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