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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여행/전라도 사찰

종남산 송광사

by Pinetree3293 2021. 4. 25.

2021.  4.  24.

 

송광사라는 이름만으로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수 있지만 완주 땅 종남산에도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순천 송광사의 중창주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듯, 이곳 완주 송광사 또한 지눌(知訥) 스님이

점지하고 훗날 그의 법손들이 일구어 놓은 대가람이었음을 잘 알지 못한다.


종남산 아래 자리한 송광사는, 번성기 때에 현재의 일주문이 ‘3km 밖 나들이’라 하였을 만큼 대찰이었다. 이후 역사의

변천 속에 폐찰이 되다시피한 것을 1600년대에 지눌스님의 유지를 따른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의 호국원찰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에 모신 불상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이적(異蹟)을 드러내곤 하였다.

KAL기 폭파사건, 12ㆍ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잠수함 출몰, 그리고 19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림으로써 IMF를 예견했다고 한다.


현재 보물 4점, 유형문화재 9점, 문화재자료 1점 등 사찰 대부분의 조형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소중한

성보들이 간직되어 있어 그 역사성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송광사는 전국 4대 지장기도 도량답게 많은

이들의 참배처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송광사 일주문

 

일주문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며, 공포는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1975년에 서암(瑞岩)

스님이 쓴 ‘終南山 松廣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3㎞ 지점인 나드리(현재 무주ㆍ진안 방면의 도로입구)라는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사 경역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1814년 정준(定俊) 스님이 조계교(曹溪橋)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 해광극인 (海光克仁) 스님이 다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문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맞이하게 되는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양식 팔작지붕 건물로이며,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정면 가운데 칸은 통로이고 좌우 칸은 금강역사상를 모신 공간인데,

통로에 면한 쪽에는 홍살 칸막이를 설치하여 금강역사상의 가슴 윗부분만 볼 수 있게 하였다.

내부에는 좌우에 각각 금강역사와 사자ㆍ코끼리를 타고 있는 문수ㆍ보현동자상을 봉안하였다.

천왕문

소조사천왕상 보물 제 12225 호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 좌우 칸에는 천왕 2위씩을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고,

중앙 칸은 통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송광사개창비문(1636년)의 화사질(化士秩)에 의하면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혀 있는데 ‘門’이라 하지 않고 격을 높여 ‘殿’이라고 부른 점이 주목된다.


정면에서 보면 중앙 칸에는 2짝 판문이 달려 있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인방 위에 홍살을 설치하였다.

좌우 칸에는 벽의 높이 3/4 부분에 상방, 1/4 부분에 하방을 설치하여 벽을 3분할하였는데, 상방 위에는 정자살고창,

상방과 하방 사이에는 판벽, 하방 밑에는 벽체를 각각 설치하였다. 측면은 모두 벽체로 막고 박공 부분에는 널판을

내려 측면 지붕 가구를 가렸다. 그런데 측벽 상부 양끝 윗부분은 천장 서까래와의 사이에 약간 틈을 두어, 측광(測光)이

천왕상 머리 뒤에서 스며들어 오도록 하였다.


1994년 사천왕상을 개채할 당시 북방 다문천왕상의 왼쪽 보관 끝 뒷면에서 ‘순치기축육년칠월일필금산화원주조상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金山畵圓主造像)’이라는 묵서(墨書)가 발견됨에 따라 1649년(인조 27)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건륭오십일년병오오월일…신조성(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1786년(정조 10)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주었다. 이로 볼 때 천왕문은 1636년

이전에 만들고 사천왕상은 1649년에 조성ㆍ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괘불대

극락전

향기가 좋은 꽃잔디

종루 (보물 제 1244 호)

 

'亞'자형 평면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짜 올린 2층 건물이다. 설립연대는 대웅전을 1층으로

고쳐 지은 시기인 1814년(순조 14) 혹은 1857년(철종 8)으로 보이며, 현재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건물인데 비해, 여기서는 보궁에 즐겨 쓰는 특수한 평면형식인 亞자형을 택하고 있어

주목된다.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계단 있는 쪽만 개방하였으며, 아래층은 흙바닥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법고ㆍ목어ㆍ운판을 걸어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다.

칸 사이는 모두 똑같이 2.5m로 소규모인데, 내외 3출목 포작을 주두 및 보간에 1구씩 짜 올려 빈틈없이 지붕을

받게 하였다.


건물 크기에 비하여 공포대가 크고 화려해 보이는 반면,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하여 세부는 섬약해 보인다. 겹처마 밑의 서까래와 부연 또한 다른 건물에 비해 가늘고 섬세하다.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 곡선은 이 건물이 누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2층 내부의 천정은 네 귀에서 짜 올라간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내부 천정 가구는 대들보 없이 창방이 대신 대들보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동종

 

1716년(숙종 42)에 조성된 동종으로 현재 종루에 보관되어 있다. 종을 거는 고리까지 포함하여 높이 107㎝이고,

아랫부분은 지름 73㎝, 두께 4.5㎝ 크기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60개의 입화식(立花飾) 꽃무늬가 있고, 그 아래에 방패모양의 꽃무늬를 양각하였다.

다시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종의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는 9.5㎝ 두께의 띠가

그 아래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의 원이 8개가 양각되어 있고 원 안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아래쪽의 세로 면에는

보살입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를 배치하였다. 보살입상은 24㎝의 크기로서 머리 뒤에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썼으며, 전패 안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양각되어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당초 무늬를 둘러놓았다.

이 범종에는 ‘강희 55년 병신 4월 전라우도 광주무등산증심사대종조성(康熙五五年丙申 四月全羅右道光州無等山證心寺大鍾造成)…’으로 시작하여 시주자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고 ‘대시주 계묘 채구 건융34년 기축 9월 중수 문광득(大施主 癸卯 蔡龜 乾隆 三四年己丑 九月 重修 文光得)’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 범종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뒤 1769년(영조 45)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불사중인 요사

 

관음전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까지 1층은 식당, 2층은 관음전으로서 각종 법회 및 학생들의

수련대회에 사용되던 2층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에 2층만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단독 건물로 복원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관음보살좌상과 관음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보물 제 1223 호)

 

송광사의 본전(本殿)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설립되었으며, 당시에는 2층이었으나 1814년에 건물이 기울어지자 1층으로 고쳐지었고, 이후 1857년(철종 8)에

제봉선사가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의 중앙에 걸린 ‘大雄殿’이라는 편액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義昌君)이 쓴 것으로,

1636년 (인조 14)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비문의 글도 그가 쓴 것이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은 편이며, 사면 벽에 48개의 구획을 나누고 나한도와

신중ㆍ보살들을 그렸다.
내부는 고주(高柱) 4개를 세우고, 옆면의 평주열(平柱列)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걸어놓았으며,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삼세불좌상(三世佛坐像)을 봉안하였다.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가설하고 그 위에 용ㆍ게ㆍ물고기ㆍ거북 등 바다동물을 장엄하였고, 우물반자인 중앙 3칸 이외의 외진부 빗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려 넣었다.


법당에는 보물 제1274호인 석가여래ㆍ약사여래ㆍ아미타여래 등의 소조삼세불상을 비롯하여 근래에 조성한 후불탱,

1857년에 조성한 신중탱과 삼전패(三殿牌) 등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은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소조삼존불 (보물 제 1274 호)

 

대웅전의 소조삼존불은 5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왼쪽(向右)에 약사여래불을,

오른쪽(向左)에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이 삼존불은 소조상으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550㎝, 무릎너비 405㎝, 무릎높이 72㎝인 석가여래좌상은 나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통견의 법의를 갖추고 왼쪽 팔에 걸친 옷 주름이 무릎을 덮고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몸체가 균형이 잡혀 있어 당당한 느낌을 준다.

 

약사여래좌상은 상호나 몸체에서 전반적으로 석가여래상과 비슷하다. 어깨 정도로 든 오른쪽 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무릎 위에 놓인 왼쪽 손에는 약합이 놓여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 무릎너비 363㎝, 무릎높이 79㎝이다.

아미타여래좌상 역시 원만한 상호로서 석가여래ㆍ아미타여래상과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오른손을 어깨 가까이

들어서 손바닥이 바깥을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 무릎너비 356㎝, 무릎높이 71㎝이다.

 

근래에 석가모니불에서 삼존불의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위시한 불경류ㆍ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불상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의 조성연대와 조성자ㆍ조성배경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조성기에 따르면 이들 삼존불은 1641년(인조 19)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과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등, 임진ㆍ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국난극복의 의지와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삼세불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리는 이적(異蹟)을 보인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조성연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혼란기를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국가적인 신앙심과 역사의식이

반영된 귀중한 자료로 여겨져,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석가모니불ㆍ약사여래불ㆍ아미타불) 3점 및 후령통 3점과 함께

일괄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었다.

 

지장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9년 신축하였다.

내부에는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 소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 등의 권속을 봉안하였다.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ㆍ무독귀왕, 그리고 그 좌우에 시왕상ㆍ장군상ㆍ사자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흙으로 만든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좌대 위에 놓여 있다. 원만한 인상에 눈ㆍ코ㆍ입 등이 가지런하며,

양 귀는 긴 편이 아니나 큼직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양팔에 걸쳐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가슴 높이로 든 오른손과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다.


근래에 지장보살좌상 복장물로 원통형 사리함, 오색사리 6과, 조성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경진년시왕조성기

(庚辰年十王造成記) 이라 기록되어 있어 1640년(인조 18) 기타 권속들을 함께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중앙에 조성된 정원

 

세심정

나한전

목조 석가여래좌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양식 팔작지붕 건물로 1656년(효종 7)에 벽암 각성(碧岩覺性) 대사가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으며 1934년 혜광스님이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두 번에 걸친 중수로 인해 서까래ㆍ천장 등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으나 주요 구조부재와 천장 구성 등에서는 18세기 불전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ㆍ인왕상ㆍ동자상ㆍ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석가여래와 16나한의 복장물 중에서 1656년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공포는 주심포 계통이나 쇠서 하단의 초각으로 미루어 18세기에 한 차례 중수되었으며, 귀공포의 쇠서에 연봉이

부가되고 첨차가 직절된 형태를 보이므로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다시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건물을 1980년대에 복원ㆍ신축한 것이다.

내부에는 1989년에 조성한 칠성탱ㆍ독성탱ㆍ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예전엔 약사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

팔각오층석탑

샘터

일주문 옆에 있는 백련다원

각종 차재료를 말리고 있다.

찻집 내부

책 몇권도 준비되어 있어 독서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찻집에서 시원한 솔잎차를 한잔 마신후 다음 행선지인 위봉산 위봉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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