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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여행/경상도 사찰

양산 영축산 통도사

by Pinetree3293 2021. 5. 9.

2021.  5.  8.

 

밀양 표충사 앞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양산 통도사 앞까지 이동하여 숙소를 정한다.

통도사의 아침은 이른 시간이지만 제법 많은 신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산문을 지나 주차장 다리를 건너면 높은 당간지주와 부도전을 볼 수 있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대국통(大國統)이 된 뒤, 646년(선덕왕 15) 왕명에 따라 창건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불사리와 부처의 가사 한 벌을 가져와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모시고, 보름마다 이곳에서 설법을

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절 이름 ‘통도(通度)’에는 이 절이 자리한 산이 석가모니불의 설법지인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과 함께,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통도사 일주문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쓰여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라는 뜻으로, 통도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종찰(佛寶宗刹)임을 알려

주고 있다.

즉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믿음의 대상으로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는 각기 부처와 불법과 승려를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삼보를 각기 상징하는 대표적 사찰로서 삼보사찰(三寶寺刹)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모신 합천 해인사(海印寺)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고, 보조국사(普照國師)를 기점으로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주 송광사(松廣寺)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로서의 사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곧 부처님을 나타내고 있다.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의 금강계단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로서,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불사리를 보관 하고 있다.

 

통도사의 역사는 곧 이 불사리(佛舍利)를 지켜온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데, 고려 말부터 왜구들이 침범하여 수차례에

걸쳐 불사리를 가져 가려 함에 서울까지 피신시켰고, 조선시대에는 왜구에게 약탈당하였다가 동래에 사는 한 거사가

이를 극적으로 찾아서 탈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사명대사(四溟大師)는 불사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금강산의 휴정대사(休靜大師)에게 보내어, 전운이

다소 후에야 비로소 황폐한 금강계단을 정리하고 다시 본 자리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또한 통도사에는 유서깊은 거찰답게 현재 총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의 전각과 많은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다. 국보 제290호인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334호),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보물 제74호) 및 봉발탑(奉鉢塔, 보물 제471호) 등 수십 종의 보물급 석탑ㆍ석등ㆍ불화ㆍ

불구(佛具) 등이 보존되어 있다.

통도사 산문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며 보는 풍경 

 

 

석당간지주

 

부도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지주석(支柱石)은 당간(幢竿)과 함께

조립하였으나, 지상에 노출된 부위만 가공된 상태이고 표토 부위에서부터 지하 2m 가량 묻힌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 중수 시에 개수ㆍ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 윤곽을 잡은 다음 다시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석 양쪽(남북)에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有溝)가 있다. 그리고 지주석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개의 간공(竿孔)을 만들고,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중앙에 간대(竿臺)를 놓고 당간(幢竿)을 세웠다.

 

당간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석당간은 원래의 형태는 아니고 후대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당간이 현존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으며 제작시기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새로 지은 일주문.  영축총림

성보박물관

 

성보박물관은 우리나라 사찰박물관의 효시로서 1987년에 상설전시실(현 노천유물관) 80여 평의 규모로 출발하였다.

그 후 1999년 4월 140억원의 예산으로 1,300여 평 규모로 신축 박물관이 완공되어 5개의 전시실을 비롯하여 수장고 및 부대시설을 포함, 첨단시설을 갖춘 대형사찰 박물관의 시발이 되었다.

500여 점에 가까운 조선시대 불교회화를 소장하여 관리하며 전시하는 명실공히 불교회화 전문박물관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기반행사로는 매년 불교문화를 널리 고양시킬 수 있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문화행사의 불모지인 양산지역의 커다란 문화기반시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박물관대학을 운영하여 일반인 및 학생들에게 우수한 불교문화재와 불교전반에

관한 재미있고 심도 깊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구름다리

찻집 연화방

 

일주문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 초창되었으나 중창은 알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1770년(영조46) 두섬대사(斗暹大師)가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의 다포식 9포작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인데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일주문 정면에 걸린

현판글씨인 ‘영취산통도사 (靈鷲山通度寺)’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것으로 영취산의 장엄한 기상에 어울릴 만큼

매우 장중하다. 또한 두 기둥에 걸어둔 주련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즉, ‘부처님의 으뜸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통도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종찰(佛寶宗刹)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천왕문과 사천왕

 

하로전(下爐殿) 구역으로 들어가는 이 문은 고려 충숙왕 6년(1337) 취암대사(翠岩大師)가 처음 세운 것으로,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조선 후기에 다시 지었다.

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아무런 장식 없이 네모난 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건물규모에 비해 작은 편이다. 건물은 중앙 칸을 통로로 하고 좌우 칸에 나무로 만든 거대한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루

 

만세루 옆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1686년(숙종 12) 수오대사(守悟大師)가

초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그 뒤에 중수된 것이며, 하층에는 범종을, 상층에는 법고ㆍ목어ㆍ운판 등 불전사물을 봉안하고 있다.

기둥은 층단주로 구성하였고, 활주는 상층 마루에 얹도록 하였다. 현판에는 ‘범종루(梵鍾樓)’ㆍ‘범종각(梵鍾閣)’ㆍ

‘통도사(通度寺)’ 등의 글씨가 적혀있고 사면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동종    보물 제 11-6 호

통도사 범종각에 봉안되어 있는 동종(銅鍾)으로 1686년(숙종 12)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사인(思印) 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스님은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는데, 이 범종은 유일하게 8괘(八卦) 문양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특히 큰 종으로 형태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종 몸통에 있는 사각형의 유곽 안에 9개의 돌기를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종은 중앙에 단 한 개의 돌기만 새겨 둔 것으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높이는 170㎝, 지름이 100㎝이며 현재 보물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림각과 내부의 가람신

 

가람각(伽藍閣)은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伽藍神)을 모신 전각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가 드물다.

이 건물은 1706년(숙종 32) 처음 건립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근래 주지 원명(圓明) 스님에 의해 신축된 것이다.

4면 한 칸씩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도량의 수호를 위해 가람신을 봉안하고 있다. 예전 건물의 외벽에는

적마의 그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소실되어 볼 수가 없다.

 

 

극락보전의 외벽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1369년(고려 공민왕 18)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그후의 중건과 중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건물의 내부에는 목조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극락보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벽의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이다. 배의 모습은 앞을 용머리(龍頭), 뒤를 용꼬리(龍尾)고 나타내었고, 그 앞뒤에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합장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 그림은 비록 근세에 그려지기는 했으나 구도와 내용면에 있어 보기 드문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통도사 극락보전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건물이지만 뛰어난 짜임새와 벽화로 인해 중요성을 인정받아 경남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    보물 제 1471 호

영산전

영산전 내부 팔상도의 일부

영산전내 석가모니불

영산전의 천장 단청

 

영산전은 하로전(下爐殿) 구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좌우에 극락보전과 약사전이 배치되어 있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30년(1704) 송곡선사(松谷禪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안과 밖에 그려진 벽화(壁畵)가 남아있어 주목을 끈다. 외벽의 벽화는 풍화(風化)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벽화는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특히 내부벽화의 하나인 다보탑(多寶塔) 그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법화경(法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을 표현한 것으로 탑신(塔身)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자리를

나누어 앉은 모습이다. 탑에는 화려한 영락(瓔珞)과 풍경(風磬)이 장엄되어 있고, 탑의 주위로는 보살과 제자, 오색의

구름이 펼쳐져 있다.

이외에도 벽에는 양류관음(楊柳觀音)과 나한(羅漢), 산수(山水)를 표현한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된 천정에는 연꽃과 보상화문(寶相華文)이 그려져 있고, 대들보에는 황룡ㆍ청룡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화려한 장엄 속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으며, 주변으로는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을 봉안하였다. 이 팔상탱은 1775년(영조 51)에 그려졌는데 당시의 불화화풍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그림이다.

이렇듯 통도사 영산전은 18세기 이후의 불화 화풍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전각으로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

 

만세루는 법회나 법당의 주요행사를 열 때 사용하던 누각이다.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만세루라 이름을 지었다.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인조 22년(1644)에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기둥의 높이가 길고 기둥 사이가 넓어 대규모의 건물로 느껴진다. 가운데 칸 양쪽 기둥 위에 밖으로는

용머리를, 그 안쪽으로는 용꼬리를 새겨 출입구를 강조했다. 내부 역시 기둥 위와 그 사이에 꽃 모양 받침의 장식이 있어 위엄이 느껴진다.

 

원래 누각은 땅에서 높이 들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건물은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건물이 높으면

많은 승려나 신도가 오르내리는 데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건물은 원래 벽이 없고 기둥만 있던 것인데,

내부바닥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라는 점을 빼고는 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전체적으로 짜여진

구조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이며,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

약사여래불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극락보전과 마주하여 서 있다. 처음 창건은 1369년(고려 공민왕 18) 성곡선사(星谷禪師)가 세웠다고 하며, 그 뒤에 언제 보수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8세기 후반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공포(다포)는 건물 4면에 모두 둘러져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앞면과 뒷면에만 있는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내부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불과 불상 뒤에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전

 

화엄전(華嚴殿)은 원통방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자리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에 초창된 건물이 있었고, 1762년(영조 38)ㆍ1883년(고종 20)ㆍ1887년(고종 24)에 중건된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콘크리트로 새로 건립한 것이다.

 

불이문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만나는 통도사의 세번째 문으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처음 지은 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善)과 불선(不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한다. 불이문을 통과하여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부처가 되고 해탈을 이룬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른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동향의 전면 3칸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되어 있다.

 

건물의 특징은 대들보 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재를 삼각형으로 짠 뒤, 그 부재 위에 장혀를 걸쳐 중도리ㆍ하중도리ㆍ

종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또한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매우 독특하다. 정면에 걸려있는 ‘불이문(不二門)’이라는 편액은 중국 송나라의 미불(米?, 호는 元章)이 쓴 것이라 전한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각

 

통도사의 역대 주지 및 큰 스님들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초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은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발탑 보물 제 471 호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정확하게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이어받는 것을 상징한 조형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명칭을 탑이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어, 유물의 성격상 ‘석조발우(石造鉢盂)’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한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ㆍ가운데ㆍ

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고 한다. 전체 높이는 약 230cm이고, 현재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화전

용화전 내 미륵불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1369년(공민왕 18)에 건립하였다. 이후 1725년(영조 1)에 청성대사(淸性大師)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특징은 세부장식에 용무늬를 많이 썼다는 점과, 내부 공포가 5출목 형식으로 천장높이까지 짜여져 11포의 화려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부 벽면에 7폭의 대형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모두 경전에 등장되는 교훈적인 내용이나 법요(法要)의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 이후에 출현한다는 약 2미터나 되는 거대한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경각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초창 및 중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 18세기

이후의 건물로 생각된다. 장경각은 통도사에 전해지는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經板)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통도사에서 약 10km 떨어진 운흥사(雲興寺)가 조선말기에 폐사될 때 옮겨온 중요한 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대광명전

 

대광명전 내부

 

중로전 구역에서 가장 웅장한 대광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의 뒤쪽에는 고주(高柱)가 세워져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25년(영조 1)에 축환대사(竺環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실제 건립연대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부에는 독존(獨尊)으로 봉안된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신불후불탱ㆍ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진경(眞景)시대의 양식적 특징인 단아한 사대부 형상을 보이고 있어 조선(영조)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이 전각에는 1759년(영조 35) 임한(任閑) 스님이 그린 삼신불탱과 1804년(순조 4)에 조성된 제석천룡탱, 1904년에 조성된 팔금강탱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있고, 2003년에 모사(模寫)를 하여

봉안하였다.

이 건물에서 재미있는 것은 법당내부 좌우 천장 아래 도리 위에 적혀있는 글귀이다. 내용은 “내 집에 한 손님이 있으니, 정녕 바다 사람이다. 입으로 하늘에 넘치는 물을 머금어, 능히 불의 정신을 죽인다(吾家有一客 定是海中人 口呑天漲水 能殺火精神)”라는 5언 절구이다. 이는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화부적(防火符籍)으로 여겨지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배를 하면서도 눈여겨 보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산조당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해장보각(海藏寶閣)으로 통하는 문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가운데 칸이

양쪽 칸보다 높게 솟아 있어 솟을삼문이라 한다. 3칸 모두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의 솟을삼문과 같다.

 

해장보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慈藏) 율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조사당(祖師堂)이다.

건물은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 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창건주 자장 율사의 진영과 함께 고려대장경 1ㆍ2ㆍ3ㆍ4권이 봉안되어 있다. 해장보각이라는 전각이름은 경전이 용궁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인도 고대의 전설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또한 대장경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와 같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도 지닌다.

 

 

5층석탑

관음전

관음전 내 관음보살 

관음전은 통도사 중로전(中爐殿) 구역에 있는 3개의 법당 중 하나로 가장 앞쪽에서 남향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725년(영조 1) 용암대사(龍岩大師)가 초창하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관세음보살상과 1858년(철종 9)에 조성한 관음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벽에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에 머물고 있는 관음보살과 남순동자를 나타내기도 하였고, 32응신(應身)을 나타내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을 표현하였다.

대들보에는 사자문 단청과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이 그려져 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전 앞 석등

 

관음전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 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양식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국보 제 290 호

 

적멸보궁 편액

 

정면 3칸, 측면 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4년(인조 22)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불이문 쪽과 금강계단을 향하여 이중으로 된 합각(合閣)이 양 측면, 전면 3곳에 마련된 것이 이채롭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중기 불당(佛堂)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사방을 돌아가며 각각 다른 편액을 걸어 놓은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 동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서쪽에는 ‘대웅전(大雄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 정면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편액은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있다. 그것은 건물 뒷편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 금강계단과 일괄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앞 계단

 

금강계단

 

금강계단(金剛戒壇)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7세기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고, 그 뒤 일곱 번에 걸친 수리가 있어서 지금은 원래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의

금강계단은 석종형의 부도, 각 상 (像)들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모습은 바뀌었지만 문헌기록상 가장 오래된 계단이며, 같은 성격을 띤 금산사(金山寺)나 용연사(龍淵寺)의 것에 비해 규모가

크고 조형미도 뛰어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계단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이다.

 

계단 주변에는 석문(石門)과 석조 난간을 둘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4천왕의

입상이 있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계단의 하층 면석에는 총 32위(位)의 불ㆍ보살상을 새겨 놓았고, 상층 면석에는 불ㆍ보살 및 비천상을 부조(浮彫)로 새겨 놓았다. 하층보다는 상층의 양식이 유연하여

수법이 월등하며, 두 손에 무기 대신에 천의(天衣) 자락을 쥐고 있는 듯한 신장(神將)의 방울눈이 인상적이다. 계단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는 복련과 앙련(仰蓮)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현재 대웅전과 더불어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

명부전내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초창은 1369년(공민왕 18)이며 1760년(영조 36) 춘파대사(春波大師)가 중건하였다.

그 후 1887년(고종 24) 불탄 것을 1888년 호성대사(虎惺大師)가 중건하였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조선 말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세부가 많이 생략된 절충식 수법으로 짜여져 있다. 통도사내의 여러 건물 중 조선말기인 고종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건물 외부의 포벽에는 여래도(如來圖)와 삼국지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으며, 내부에도 봉황이나 별주부전 등의 설화가 포벽에 그려져 있다. 존상으로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ㆍ무독귀왕ㆍ시왕상 등 명부권속(冥府眷屬) 등과, 근래에 조성한 시왕탱을 봉안하였다. 원래는 1798년(정조 22)에 조성된 지장탱과 1775년(영조 51)에 조성한 시왕탱 등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경남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전은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智暹大師)가 창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이다.

지대석ㆍ면석ㆍ갑석 등을 고루 갖추어 고풍스런 멋이 느껴지는 기단 위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주심포 형식으로 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양식을 보여 준다.

 

내부에는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를 모시고, 다시 그 좌우로 16나한상과

범천, 제석천 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 유성(有誠) 스님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926년 축연(竺衍) 스님 등이 조성한 16나한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이 건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안팎에 그려진 벽화들로서, 바깥의 측면에는 금강역사가, 내부에는

달마ㆍ나한ㆍ학ㆍ독수리ㆍ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경남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내부

 

삼성각은 1870년(고종 7) 영인대사(靈印大師)에 의해 초창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35년 경봉선사(鏡峰禪師)가 중건한 것이다.

건물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로 주심포계 익공식 맞배집이다.

일반적으로 삼성각은 칠성ㆍ독성ㆍ산신 등을 봉안한 전각인 데 비해, 통도사의 삼성각은 지공(指空)ㆍ나옹(懶翁)ㆍ

무학(無學) 등 세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산령각 내부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씩의 맞배지붕 건물로 초창은 1761년(영조 37)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1986년 소실된 뒤에 곧바로 다시 지은 것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모신 곳으로 내부에는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관련하여 통도사는 일종의 호랑이 혈맥(血脈)인 호혈(虎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찰 내 두 곳에 이를 진압한 호혈석(虎血石)을 두고 있는데 그곳은 응진전 옆 남쪽과 극락전 옆이다.

이 돌의 크기는 길이 약 1.5m, 폭이 80cm 정도의 널찍한 반석이다.

조선시대 목조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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