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영혈사를 출발한 시간이 꽤 늦었지만 가까운 거리의 낙산사로 향한다.
일주문을 지나 유스호스텔 앞을 지나는데 범종의 울림이 은은하게 들려온다.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이 중건(重建)한 이후 몇 차례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世祖)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虹霓門)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은 소실되었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고 하며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고 이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삼척, 강릉, 고성을 휩쓴 큰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원통보전과 여러채의 전각이
소실되고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화마에 녹아버렸다.
낙산사는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일주문
입구 옆 유스호스텔.
홍예문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범종 소리에 놀랐는지 토끼가 뛰어 다니다 멈추어 섰다.
범종각
사천왕문
빈일루
빈일루를 지나 원통보전으로 가는길
원통보전으로 가며 돌아본 빈일루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의 건칠관세음보살 보물 제 1362 호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통보전앞 7층석탑 보물 제 499 호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
건너편에 해수관음상이 보이고
아래쪽으론 보타전이 보인다.
해수관음보살
낙산사 성보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해수관음상은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川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이제 해는 넘어가고
낙산해수욕장
보타전
보타전은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1991년 7월 짓기 시작해서 1993년 4월 10일에 완공했다. 규모는 앞면5칸, 옆면3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보타전은 배산임수의 지형 덕으로 지난 2005년 대형 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보타전의 7관음상
보타전 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성관음(聖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관음(准堤觀音)·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그야말로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셈이다.
이렇듯 많은 관음상을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구제와 해탈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수와 일치한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상의 재질은 모두 목조로서 백두산에서 자라는 홍송(紅松)을 사용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7관음상을 봉안하던 날에는 이적(異蹟)이 일어나 불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날 밤,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청학(靑鶴) 다섯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늘 거친 파도소리를 토해내던 동해 바다가 문득 조용해졌으며, 무지개와 같은 서기광명(瑞氣光明)이 온 하늘에 가득 찼다. 또한 그날 밤 신도회장은 동해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켜 보타전까지
날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요사
보타락
보타락과 연못
의상대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체조스님의 활동 년대가 18세기이므로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이때까지는 의상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홍련암 가는길의 연하당
홍련암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낙산사의 산내암자의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 북쪽300m 지점에 있다. 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한 장소로서,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 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화로서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그 곳에 불전(佛殿)을 지으니 곧 홍련암이라고도 전한다.
두 이야기 전부 의상대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내용에서는 일치하며, 부분적으로 파랑새· 대나무·석굴 등이 첨가된 것이므로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에 혜민(惠旻)스님 중건, 그리고 1869년(고종 6)에 의연(義演)스님이 중건했으며 1911년에 흥운(興雲)· 청호(晴湖) 두 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교적 짧고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전각이나 불상·불화등에서 오래된 것은 없으나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에는 동암 도봉(東庵道峰)스님이 1962년에 중건한 봉향각(奉香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관음전 등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관음전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바닷가 암석굴(巖石窟)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전각은 법당 가운데쯤에 조그맣게 마루를 뚫어 놓아 그곳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실감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절 근처 바닷가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石澗水)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스님이 양양에 있는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 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샘물은 지금은 보타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찻집
낙산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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