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5.
설악동의 숙소 창문을 열면 바로 정면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수 있는 권금성의 바위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붉으스름하게 빛나고 있으며 아침 먹이를 찾는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럽다.
숙소를 나와 몇걸음 걷지않아 신흥사의 청동대불이 눈에 들어온다.
신흥사는 국립공원 설악산 입구에 위치하여 많이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남한) 속초시 설악동(雪岳洞) 설악산에 있는 사찰로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고 불렀다.
고기(古記)에 자장이 637년(선덕여왕 6) 왕명으로 당(唐)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 수천칸(間)의 대사찰이 하루 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후 의상(義湘)이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能仁庵)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禪定寺)라고 하였으며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논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小林庵)으로부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선정사 때 봉안된 것으로 의상이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이다. 당시 지은 법당·
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한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靑銅)시루와
범종(梵鐘), 경판(經板) 227장,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숙소에서 보이는 권금성
신흥사 일주문
설다원 찻집
통일대불
불 상 : 석가모니불
높 이 : 14.6m
좌대높이 : 4.3m
좌대직경 : 13m
소요청동 : 108톤
좌대조각 : 통일기원 16나한상
착봉일 : 1987.8.30 (음력 7.7)
점안 대법회 : 98. 10. 25
민족통일의 비원(悲願)을 안은 청동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곳 설악에 나투어 대자비로 비추사 분단의 아픔
을 끌어 안았다.속초 설악산 신흥사(주지 度吼)는 10년간의 통일청동대불좌상(統一靑銅大不坐像) 조성
불사(佛事)를 마치고 드디어 '97년 10월 25일 점안' 대법회를 봉행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을 형상화한 청동대불은 거불(巨佛)로서 좌대 높이 4.3m, 대불 높이 14.6m, 좌대 직경 13
m, 아파트 6층 높이에 1백8t의 청동이 사용되었다. 8면 좌대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십육 나한상(十六羅漢
像)이 섬세하게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화려한 것은 지름 10㎝의 인조 큐빅 1개와 8㎝짜리 8개로된 미간 백호는 중생계의 무명을 밝혀주듯
찬란한 광채를 발광한다. 점안식*에서는 '92년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3과와 다라니경, 칠보
등 복장 유물도 봉안되었다.20세기 불상양식으로 기록될 신흥사 통일대불(新興寺統一大不)은 불상의 대가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정영호(교원대 박물관장), 고(故) 홍정식(전 동국대 교수), 김정기(한림대 교수)
가 자문하였다. 불모(佛母) 김성호(불교미술관장)와 자문위원들은 수시로 만나 청동대불의 석고, 주물,
조립을 비롯한 모든 과정을 점검하며 제작에 헌신하였다.
87년 8월 공사를 시작한 청동대불 법사는 4년 동안 석고로 불상의 원형을 만들었고 '94년에는 주물 작업
을 끝냈으며, '95년에는 청동조각조립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10년간의 조성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30만 명이 동참하여 무사하게 봉안될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인종과 종교, 종파를 떠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뜻이 불상 조성에 녹아 들었다. 특히
실향민이 많고 북한과 인접한 신흥사에 통일대불이 봉안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강 같은 세월은 청동대불이 봉안되기까지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스님이 세불이
나(慧法 · 知洪 · 度吼) 바뀌는 동안 이룬 대역사(大役事)로 종교의 벽을 넘어서는 불교 문화사에
큰 기록 으로 남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현대를 칠기 시대라고 한다면 철기 시대의 유산으로 후대에 또한 기억될 것이다.
※ 점안 의식(點眼儀式)은 불교 신앙의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으로 개안 의식(開眼儀式)이라고도
한다.불상(佛像)을 점안할 때에는 팔부신장을 청하여 도량을 옹호하게 하고 시방의 불보살님께 오늘의 불
상, 탱화에 대한 내력을 설명한다. 또한 오색실을 사용하여 부처님의 천안통과 천이통, 타심통, 신족통,
숙명통, 누지통, 신통력, 용맹력, 자비력, 여래력이 청정하게 성취되기를 기원한 뒤에 불상의 눈을 붓으로
그리게 되는 의식이다. <신흥사 홈페이지>
향로
석등
권금성 일대
우측에 뾰족한 세존봉도 보이고
신흥사의 돌담
극락교
사천왕문
사천왕
범종루
보제루
보제루의 기둥
종무소와 수조
극락보전
이 건물은 신흥사의 중심 전각으로 조선시대인 1647년(인조25)에 지었으며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의 주인공인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봉안하는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다.
그래서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 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아미타신앙이 성행(盛行)하였고,
많은 사찰에 극락보전 무량수전 또는 미타전이 들어서 아미타불을 봉행하였다.
고통의 바다에 살고 있는 무릇 중생은 누구나 지극한 행복을 원한다. 이 지극한 행복을
극락(極樂) 또는 안양(安養)이라 하는데, 누구나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 바로 아미타불 이시다.
신흥사 극락보전은 창건 후 1750년(영조26)과 1821년(순조21)에 각각 중수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의 크기는 190㎡로서 목조, 와가 이며 원형보존이 잘되어져 있으며 전각 안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우측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함께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보전 현판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불상
아미타불 (阿彌陀佛)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인데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10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고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지나 성불하였으니 이가 아미타불 이다.
구원한 옛적에 성불한 아미타불(本佛)에 대하여, 이 부처님을 10겁 전에 성불한 아미타불(迹佛)이라 한다.
대세지(大勢至)보살은 아미타불의 바른편 보처(補處)이고
아미타불에겐 자비문과 지혜문이 있는데, 관세음은 자비문을 표하고, 대세지는 지혜문을 표한다.
이 보살의 지혜 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3도(途)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 하며
또 발을 디디면 삼천 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형상은 정수리에 보배병을 얹고 아미타불의 바른쪽에 있으며,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아 갈 때에는 합장하는 것이 통례이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보살의 이름으로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의 하나로 아미타불의 왼쪽에 보처(補處)하며 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뜻이고,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그 종류로는 6관음(성 천수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이 보통인데 그 중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 이며 그 정토(淨土), 또는 있는 곳을 보타락가(補陀落迦, Potalaka)라고 하나,
원래 『화엄경』에 남인도 마뢰구타국의 보타락가라 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에서는 절강성의 주산도(舟山島)를 보타락이라
한다.
적묵당
괘불대
명부전
보제루
1770년(영조 46)에 세워진 것으로, 장대석으로 2단 쌓은 기단 위에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선방과 요사채로 둘러싸여 있는 마당을 둘러싸 사찰 중심의 영역의 공간성을
확보해 준다.
건물의 하부는 기둥으로만 구성된 열려있는 공간으로 극락보전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진 모습을 보여 주는 보제루 내에는 법고와 목어, 대종, 경판이 보관되어 있고
몇 몇의 현판과 중수기가 걸려 있다. 이 중에는 이 사찰이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여 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삼성각
부도전은 일주문 우측의 산 밑에 따로 있는데, 경내 우측에 부도와 비가 별도로 또 있었다.
신흥사 전경
수조의맑은물. . . .
종무소
정진중이라 출입을 금하고 있는 선원
부도전에 있는 5층석탑
부도전
부도 (浮圖)는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 하고,
중국에선 옛날에 스님들을 일컫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
이 부도군은 1644(인조 22)에 신흥사가 중건된 이후 역대 고승들의 부도를 단일 장소에 조성한 전형적인 부도군으로,
19개의 부도가 있다. 대원당탑(大圓堂塔) 등 3개가 원당 모양의 부도이며, 성곡당탑(聖谷堂塔)등 16개가 석총 모양인데,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이 12개이다. 부도와 함께 신흥사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흥사 사적비(新興寺事蹟碑)를 비롯하여
강세황(姜世晃)이 쓴 용암당 대선사비(龍巖堂大禪師碑)등 6개의 비석이 있는데, 1764년부터 1827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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